기차역은 우리 가족의 추억만들기의 시작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차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 ‘폐역’은 그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묘한 감성을 품고 있죠. 저에게는 이 쓸쓸하면서도 역사적인 공간이 아이들에게 과거의 시간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교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족여행을 계획했으며, 경주와 그 주변을 돌고 폐역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안강역에서부터 시작해 규모가 컸던 불국사역을 거쳤고, 독특한 옛 양식을 간직한 아화역과 건천역, 그리고 가장 쓸쓸했던 동방역을 지나 현대화된 서경주역까지 방문했습니다. 역마다 풍기는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으며, 어떤 곳은 과거의 흔적조차 희미했지만 어떤 곳은 여전히 ‘기차가 곧 올 것 같은’ 생생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후기에는 우리 가족의 첫 폐역 경험에서부터 다음 여행 목표까지, 기차의 시간이 멈춘 이 공간에서 우리가 발견한 특별한 점들을 담아봤습니다.

출처: 폐역 철망 울타리 사이 거미줄-직접 촬영
첫 번째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한 시작 안강역
안강역은 우리 가족의 첫 폐역 탐방지였습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 구 안강역사는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고, 안전바가 설치되어 있어서 틈새로만 내부를 엿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폐역된 안강역 주변은 특별한 상권이 없이 집들과 주차된 자동차만이 쓸쓸하게 보였으며,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 기차의 역사를 돌아보려던 곳이라 기대가 컸는데, 온전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폐역 뒤로 새로 건설된 신 안강역은 깨끗하고 현대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비록 방문했을 때 우리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역 대기실에 있던 대나무 조경이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안강역만의 특유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간이역들은 승차권을 판매하지 않고 무인으로 운영되며 코레일톡이나 승차 후 승무원에게 구입해야 한다는 것도 새로운 정보였습니다. 구 안강역사는 1918년 중앙선 개통 시기에 지어졌으며, 당시 일제강점기 철도 물류 운송의 주요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오래된 건축물에서 경북 지역 철도 역사를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폐역 주변 안강에는, 예전에 아내와 15년 전에 와서 먹었던 돼지 두루치기 식당이 아직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그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

출처: 철망 울타리 사이 구 안강역-직접 촬영
가장 오래 머물렀던 추억의 구 불국사역
폐역된 불국사역은 아마 수학여행이나 오래전 경주를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기억할 겁니다.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가 다녔을 것이고, 특히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찾는 지역민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추억의 역이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다녀본 곳이기도 했으며, 아이들과 함께 찾아보았던 곳입니다.
사실 이 폐 불국사역은 제가 폐역들 중 제일 오래 머물렀던 곳입니다. 신기하게도 기찻길 위로 다른 마을과 연결하는 도로가 역 바로 옆에 형성되어 있었고, 도로 양 옆으로 철길을 볼 수 있었기에 더 독특하게 느껴졌습니다. 불국사역 주변에는 창고 건물, 관리 건물, 화장실, 그리고 숙소 같은 곳도 함께 볼 수 있었으며, 다녀온 폐역들 중에서 규모가 남달리 컸던 기억도 있습니다. 불국사역은 1930년대 동해남부선 개통과 함께 지어졌는데, 경주 유적지를 찾는 관광객이 몰리면서 규모가 커졌고,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나 지나가는 길이라면 폐 불국사역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폐역이 아니라 지금도 조금만 손보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누군가 이 역을 또 다른 모습으로 가꾸어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만들어 준다면 아주 좋을 것 같았습니다.

출처: 폐 철로 뒤로 보이는 폐역된 불국사역-직접 촬영
독특한 건축 양식의 시골 풍경 아화역과 건천역
시골 들판의 시원한 기억, 아화역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아화역이었습니다. 이곳도 안강역과 마찬가지로 폐역된 구 아화역과 새로 이전한 신 아화역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신역에서 아이들과 함께 넓은 시골 들판 풍경을 보며 걸었던 시원한 추억을 가진 역이 되었습니다.
이 구 아화역은 안강역과 달리 처음 본 독특한 양식의 역사라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듯한 양식과 출입구 문이 아닐까 싶었고, 역 입구 왼쪽 간판에 적혀 있던 ‘선덕여왕 팔찌와 사랑이야기’라는 문구도 독특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이 역사는 우리나라 간이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서양식 목조 건축 양식과 일본식 건물의 특징이 혼재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지붕 모양이나 창문 배치에서 그 시대의 건축 특성을 엿볼 수 있고, 폐 아화역사 앞 주변 도로에 피어 있던 아름다운 길가 옆 꽃들과 작은 판자집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판자집에서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날 이 역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그 시절 먹었을 법한 따끈한 군고구마나 오뎅, 떡볶이, 국수, 순대 등 추억의 음식을 팔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출처: 길가옆 꽃 뒤로 보이는 폐역된 아화역-직접 촬영
은행나무와 쓸쓸함이 교차한 건천역
아화역사를 아이들과 답사 후 알게 되었던 폐 건천역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 역은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해야 했고, 처음 본 폐 건천역은 아화역과 건물 양식이 흡사했지만, 분위기는 또 달랐습니다. 건천역 역시 아화역과 같은 시기인 1918년 중앙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으며, 두 역 모두 목조 건물이지만, 건천역은 주변의 큰 은행나무들 덕분인지 시간이 더 멈춘 듯한 고요한 분위기가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입구에 들어서자 역사보다 더 커 보이던 양측의 은행나무였으며, 이 은행나무 열매로 인한 지독한 냄새였습니다. 아이들이 발을 밟지 않으려고 동동 구르던 모습과, 코끝을 자극했던 그 냄새, 그리고 이미 철거된 철로와 함께 완전히 버려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 역사 앞에서 앞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는 현대 시대의 아파트 건물이 보였고, 철거된 철로 나무더미에 누워 따뜻한 햇빛을 쬐고 있던 고양이 모습,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며 노는 모습 등 구시대와 현시대가 대비되는 풍경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출처: 폐역된 건천역 앞 큰 은행나무-직접 촬영
가장 쓸쓸했던 동방역, 그리고 서경주역
스산한 바람이 불던 동방역
이 역은 있는지도 모르고 불국사역에서 스쳐 지나간 후 알게 된 폐역 동방역입니다. 역은 매우 작았고, 주변 상권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동방역은 다른 역들에 비해 여객 취급이 적었던 무배치 간이역으로 1992년에 영업을 시작했지만, 낮은 이용률과 경주 외곽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른 역들보다 빠르게 쓸쓸한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주변은 스산한 바람과 함께 오래된 역사 출입구 옆 나무들이 날리고 있었으며, 역사 앞은 무성한 돌과 잡초, 그리고 거미줄로 덮인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방역사 뒤로는 따뜻한 햇살이 아파트를 비추는 모습이 보였고,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비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녀본 폐역들 중 가장 쓸쓸해 보였던 기억이 있어, 글의 제목 또한 쓸쓸하고 찬 기운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포스팅했습니다. 이곳은 이용객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동방역사 앞 내리막 도로 양측에는 상점 형태는 볼 수 없었고, 오래된 방앗간 같은 곳과 주택들만 있었습니다.

출처: 녹슨 철문과 굳게 잠긴 동방역-직접 촬영
현대와 맞닿은 마지막 서경주역 탐방
지금까지 다녀본 폐역들 중 마지막은 서경주역입니다. 이곳은 폐역된 구 서경주역과 새롭게 이전한 신 서경주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가족여행 중 아이들과 함께 들린 마지막 장소입니다. 금장교를 지나자마자 작은 사거리가 나왔고, 택시에서 내려 경사진 언덕길로 올라가니 폐역된 서경주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폐역이나 구 역사였던 안강역, 아화역, 건천역, 동방역 같은 다른 곳들보다는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아마 폐역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 같았습니다. 구 서경주역은 2021년 동해남부선 고속화 및 경주역 신설로 인해 폐지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에 영업을 멈췄기 때문에 시설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주변에 인구 밀집 지역인 금장리가 가까워 현대적인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역사 주변 철거된 철로 주변에는 쓸쓸한 잡초와 자갈들이 보였지만, 이전 다른 곳들보다는 그렇게 쓸쓸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운행해도 될 정도의 깨끗함과 주변 식당, 학원, 병원,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즐비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많았고, 사람들도 거리에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특히 이곳은 아이들이 현대에 살아가는 곳과 비슷해서인지, 폐역이라는 기분보다는 “아빠, 아직 기차가 다닐 것 같아”라는 아이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출처: 구 서경주역 앞 버려진 역과 같은 나무잎-직접 촬영
다음 여행 계획과 폐역 추천 동선
다음 여행은 혼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찾아본 자료를 보니 주변의 나원역, 서경주신호장역, 청령역, 율동역, 사방역, 모량역 등은 폐역사가 사라지거나 역사 간판조차 보지 못하게 봉쇄되거나 방치된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가기에는 역사적 교훈이나 주변의 즐길 거리가 부족할 것 같아 아이들과는 동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 삼아 볼 수 있는 곳만 둘러볼 예정이며, 이후는 동해선을 따라 영해역 위로 올라가볼 예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목표는 처음 강릉역으로 ITX-마음을 타고 1박 2일을 가려고 예정하고, 코레일톡에서 시간표까지 확인했었습니다. 하지만 시험 기간인 첫째 아들과 아내의 일 때문에 모두 날짜가 맞지 않아 결국 취소되었던 강릉 가족 기차여행을 꼭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역사적 가치를 부여해 줄 폐역으로는 구 불국사역과 서경주역을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두 곳 모두 주변 상권이 잘 갖춰져 있었고, 아이들에게 간식이나 식사,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드라이브 삼아 다른 역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경주에 도착해 폐역 탐방에 관심이 생긴 분들을 위해 저희 가족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실용적이고 알찬 동선을 추천해 드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역사적 교훈과 휴식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출처:영해역에서 영해 만세시장 가는 길에 보인 누리로-직접촬영
폐역 탐방 추천 동선 (경주 도착 가족 여행)
1️⃣ 아화역 (A-Hwa Sta.): 가장 먼저 아화역을 둘러보세요. 1918년에 건축된 간이역 특유의 소박한 건물을 볼 수 있었고, 주변의 넓은 시골 들판 풍경이 시원했습니다. 폐역 앞 판자집을 보며 과거 역 이용객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답사를 마친 후에는 건천 IC가 가까워 다음 목적지나 귀가 동선을 잡기 편리했으며, 드라이브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잡아도 효율적입니다.
2️⃣ 건천역 (Geoncheon Sta.): 다음은 건천역입니다. 이곳은 아화역과 건물 양식은 비슷했지만, 역사보다 더 큰 은행나무가 양쪽에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철거된 철로 너머로 현대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독특한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은행 열매가 없는 계절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하며, 아이들과 함께 햇빛을 쬐는 고양이나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잠시 쉬어가 보세요.
3️⃣ 동방역 (Dongbang Sta.): 동방역은 불국사역 근처를 지나는 길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느낌으로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녀본 폐역들 중 가장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고, 규모가 매우 작았으며 주변 상권이 거의 없어 시간이 완전히 멈춘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오래 머물기보다는 조용히 그 스산한 분위기와 구시대의 흔적을 느끼는 정도로 계획하세요.
4️⃣ 불국사역 (Bulguksa Sta.): 불국사역은 폐역 중 규모가 가장 컸고, 역사적 의미가 큰 곳입니다. 역 바로 옆 도로를 따라 철길 흔적을 볼 수 있어 독특했으며, 주변에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고 휴식하기 좋은 영지설화공원이 있습니다. 불국사나 석굴암 방문 동선에 연계하면 효율적입니다.
5️⃣ 안강역 (Angang Sta.): 마지막으로 안강역입니다. 이곳에서는 구역사와 현대적인 신역사를 동시에 볼 수 있어 시간의 흐름을 비교하기 좋습니다. 신역 대기실의 대나무 조경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주변에 유명한 돼지 두루치기 식당이 있었고, 현지 맛집에서 식사 일정을 해결하며 폐역 주변 상권의 활기찬 모습도 함께 관찰해 보세요.